6. 스토리
무대는 유럽(좀더 구체적으로는 이탈리아). 공익 법인인 "사회 복지 공사"에서는“나라를 위한 일”이라며 여러명의 소녀들을 모으기 시작한다. 그러나 그 소녀들은 조건부라는 단서를 단채 의체로서 암살에 이용당하고 있었다. 각각의 소녀들에게는 첩보관들이 배정되어 그 아이들을 관리하고, 명령 감독하는 일을 담당한다
사회 복지 공사에 의해 자유로운 신체와 일이 주어졌지만, 결국 그 나이어린 소녀들이 하는 일은 국가의 이름으로 행해지는 청부 살인업이나 다름없었다. 공사와 살인 현장을 오가는 단조로운 삶이었지만 그런 삶에조차 소녀들은 행복을 느끼고 있었는데.....
오우기는 함내의 최고 지휘권자로써 위기상황에서 아랫사람들을 되도록 많이 퇴함시키고, 자신은 끝까지 남아야한다는 ‘선장의 의무’를 다하려 합니다. 출정 전부터 제로에 대한 책임을 지겠다며 죽음을 각오했었고, 그 결과 처참하게 대패한데다, 이 지옥으로 동지들을 끌고 온 결정에 힘을 실어준 것은 자신이었으니 전우들을 향한 부채감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죠. 아이러니하게도 그의 이런 행동은 후반의 를르슈와 정반대되는 양상을 보이나, 두 사람의 지시가 비슷한 심경에서 비롯된다는 걸 감안하면 이 남자는 또다시 본의 아니게 를르슈와 행동의 궤도가 겹친 셈입니다.
생각해보면 프레이야말고 다른 병기가 없는 주제에 제공권을 제압하려면 저 정도 방벽은 필수겠더군요. 극악의 탄두와 극강의 방패를 동시에 쥔 셈이죠.
전술자체가 통용되지 않는, 단순하면서도 절대적인 최종병기에 대해 를르슈도 가장 무식하면서도 확실한 전법을 밀어붙입니다. 프레이야는 이래저래 재발사까지 시간이 걸리는 물건이니 그 사이에 자살부대를 계속 전진시키면 비록 빵구가 여기저기 나긴 하겠지만, 프레이야를 함부로 터뜨리지 못하게 될 테니까요. 자기가 쏜 대포알에 스스로도 쓸려나가면 그게 무슨 개쪽이겠어요? 이에 슈나이젤은 역으로 리미터를 다시 걸어 범위를 축소시킨 뒤 다모클레스에 여파가 안 올 정도로 아슬아슬하게 거리를 잡아 재차 터뜨리려고 했으나, 시간이 걸리는 고로 를르슈는 바로 이를 틈타 후퇴시키던 아발론을 돌진시킵니다.
그러나 아발론을 떨군 것은 슈나이젤도 프레이야도 아니었죠. 를르슈 자신이 키워낸 전사들이었습니다.
성각은 역시나 반격의 찬스를 놓치지 않습니다. 그가 제국군의 뒷덜미를 잡아챈 원리는 간단했죠. 후지산 폭발로 날아간 병력 중 멀쩡한 녀석들을 저공, 혹은 땅바닥에 짱 박히게 한 후 를르슈가 마지막 돌격을 하겠다고 전진한 순간, 이를 지나쳐보낸 뒤에 기어 나온 겁니다. 사방에 흩날리는 재 때문에 시야가 흐려진 데다, 전방에서 날아드는 폭탄에만 신경 쓴 나머지 색적에 주력할 여지가 없었던 게 이런 결과로 이어진 거죠.
알비온과 맞붙은 신호가 그나마 버틸 수 있었던 이유는 성각의 무력이 스자쿠에게 판정승을 거둘 정도인데다, 기체가 워낙 오버스펙으로 유명한 물건이니 특유의 과다출력으로 버텨낸 거죠. 그래봤자 불량머신의 한계를 금방 드러내지만요.
슈나이젤은 용도가 다한 흑기사단도 겸사겸사 밀어버리려 하는데, 성각에게 태연히 사기치는 걸 보면서 이 인간의 가면이 얼마나 두꺼운지 새삼 실감했습니다. 집단군사력이 더 이상 쓸모가 없다는 말은 절대적인 전략병기인 프레이야와 이를 받혀주는 다모클레스의 효용성이 완벽하게 증명된 이상, 앞으로 자신이 제압해갈 난세와 펼쳐갈 치세에 있어 전술집단은 개념조차 필요 없다는 뜻이기도 하죠. 하긴 극악의 최종병기를 손에 넣은 자에게 병정놀이가 가당키나 하겠습니까?
를르슈가 터뜨린 후지산의 재가 프레이야의 폭발에 밀려 멀리 떨어진 도쿄마저 흐리는데, 1차 걸프전 때 후세인이 적군의 진공을 늦추겠다고 쿠웨이트의 유전에 싸그리 불을 붙여 저 비슷한 참상이 벌어졌던 게 떠오르더군요. 원자탄 터진 후에 내리는 죽음의 재와도 비슷해 기분이 더러워지더라고요.
성각과 토도가 스자쿠를 통렬하게 공박하며, 지노도 지킬 게 뭐 있냐고 비꼬는데요, 생각해보면 를르슈나 스자쿠나 작중 주요인물들 대부분에게 간도 쓸개도 없는, 더할 나위 없는 저질들로 인식될 수밖에 없죠. 솔직히 시청자들 입장에서 그놈의 제로 레퀴엠이 뭔지를 모르니 아주 동감이 안 가는 건 아닙니다.
실력차는 둘째치고, 성능차는 말할 것도 없는데다 기체손상과 부상이 적지 않은 상황에서도 토도가 만만찮게 버티는데, 흑기사단의 의지와 부정한 모리배(...)들을 향한 분노가 얼마나 곧고 큰지 잘 보여주죠.
토도나 치바가 괜히 스자쿠를 붙들고 늘어진 게 아닙니다. 성각이 천자포로 아발론에 빵구낼 시간을 벌었던 거죠. 제 아무리 일기당천이라도 쪽수에서 밀리면 이게 문제라니까요.
타마키가 드디어 한 건 제대로 하는 걸 보면서 무심코 엄지를 치켜들었습니다. 한순간이나마 스자쿠를 붙들어 매서 흑기사단이 확실하게 돌입하게끔 쐐기를 박았잖습니까? 그러고 보니 1기에선 스자쿠가 나올 때마다 첫 빠따를 담당했던 게 이 친구였던 걸 생각하면 인연 어쩌구도 틀린 말은 아니죠.
생각해보니 이 친구들 진짜 황당하네요. 아니 적이 됐더니 세배도 아니고, 삼백배는 실력이 증대된 것 같은데다, 미치도록 물고 늘어지는데... 이런 게 적 보정이라 이건가요? 진작에 저만큼 실력 발휘했으면 좀 좋답니까?
니나가 따라가겠다고 한 건 그만큼 어려운 프로그램을 순식간에 입력해야 하니 직접 하겠다고 나선 겁니다만... 를르슈가 니나를 두고 간 이유는 단순히 책임감의 문제만이 아니라, 아까 전 로이드 일당에게 명령했던 것처럼 전후에 나름대로 해야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서가 아닐런지.
니나의 기분도 복잡하죠. 그녀가 저 말을 듣고 싶었던 상대는 달리 있었으니까요. 더 이상 이루어질 수 없는 염원이지만요.
를르슈는 방금 전 흑기사단이 그랬던 것처럼 수중용 기체까지 다닥다닥 긁어모아 최후의 도박에 나섭니다. 동생이 직접 나서자, 슈나이젤은 실망하는데, 체스도 그렇고 전장에 최고지휘관이 직접 납셔야 할 정도면 전황은 결단 난 거나 다름없으니까요.
우리의 키보드워리어께서 수많은 프로그래머들의 어처구니를 날려버리시는데... 그러니까 막 반응을 하기 시작했을 때의 데이터를 파악해 역반응 조건을 입력한 후, 터지기 시작한 순간 요 꼬챙이를 맞춰서 상쇄시켰다 이거죠. 19초와 0.04초?! 니들이 무슨 코디네이터냐?
개인적으로 전투씬에서 제일 황당했던 게 지노의 회전회오리(...)칼질과 카렌의 롤링어택이었는데, 애네들 스자쿠랑 몇 번 투닥거리더니 용권선풍각을 벤치마킹하는 경지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카렌의 몸통박치기, 발차기, 칼질로 이어지는 질투3연차지가 기차더군요.
아냐의 실력은 역시 마리안느 덕을 본 것이라 할 수 있죠. 마리안느가 머물던 소녀와 마리안느를 숭배하던 사내의 싸움이라. 생각해보면 두 사람 다 마리안느 덕에 삶이 뒤틀려나갔던 자들이고, 몰드렛드나 서덜랜드 지크는 이전에 심해에서 사이좋게 가라앉은 거웨인과 지크프리트의 후계기들이니 나름대로 찐한 싸움판을 연출하고 있는 셈입니다.
길포드의 생환이 기쁘긴 합니다만... 그러고 보니 를르슈를 구해준 직후에 기체가 어중간하게 박살나고 통신이 끊겼는데, 빈센트가 완전히 갈려나가는 장면은 나오질 않았던 게 이것때문이었군요. 허참 이래저래 2기의 오렌지가 되버렸단 말이죠. 명 질긴 것도 그렇고요. 눈은 아마도 강렬한 빛에 실명한 것 같습니다.
코넬리아는 길포드에게 미안한 마음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저 동생의 명예회복과 복수만을 위해서 하나뿐인 직속기사를 비롯해 수하들과 책임을 모조리 내팽개쳤던지라 최소한 눈앞의 기사에게만큼은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으니까요. 그저 경애하는 주군이 돌아오기만을 빌며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 자리를 지켰던 사람이니...
디트할트는 숭배자답게 나중엔 슈나이젤과 동화되다시피 해 그의 진의를 카논보다 먼저 공감해 내뱉더군요. 를르슈가 전직기자에게 괘씸죄를 적용한 이유는 배신 때문이 아닙니다. 이놈은 어떤 거창한 목적이나 소탈한 바램이 아니라, 같잖은 미학을 위해서 피바다를 만들고 혼돈을 위한 혼돈을 추구하는 종자였기 때문이죠. 자신이나 슈나이젤의 암부를 한껏 뒤틀어서 압축한 듯한... 슈나이젤이 제로에게 복종하란 기어스에 걸려 제로라 부른 데 반해 이놈은 무심결에 를르슈를 끝까지 제로라 부르고 있는 것만 봐도 그렇습니다.
그런고로 빠돌이에게 있어 가장 잔혹한 최후를 안겨준 거죠.
녹과 적
C.C.는 퍼시발의 방패를 가지러 오는데, 저번 편에서 스자쿠가 당부했던 말이 생각나는 대목이죠. 파트너의 방패가 되겠다는 결심을 받혀주는 소품이랄까요. 카렌이 튀어나왔을 때, 요걸로 홍련을 막고, 연이어 공격을 가해 를르슈의 활로를 뚫어줬던 게 다 이유가 있었죠. 를르슈도 여인의 의도를 눈치 채고 끝까지 함께 할 보디가드로써 지명했던 겁니다만.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기에 C.C.는 그간 남몰래 품고 있던, 개운치 못한 사안마저 확인하려 드는데, 뻑하면 땡깡부리기 바쁘던 머스마가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자기 책임이라며 간만에 기특한 소릴 하더군요. 스스로에 대해서도, 파트너에 대해서도 인정할 건 확실히 인정한 거니까요. 덕분에 분위기가 달아올랐지만... ‘난 이 커플 반댈세!!’하고 튀어나온 누구씨덕에 절묘하게 산통 다 깼죠.
카렌은 22화부터 스자쿠랑 역할을 바꾼 양태를 본편에서 쏠쏠하게 내보입니다. 바로 앞에서 미사일 갈겨대는 C.C.는 제낀 채 끝까지 를르슈만 노려보는 것도 그렇고... 한 때 누구보다도 믿음직했던 오른팔이 되려 청년의 목을 졸라댑니다, 쩝.
개인적으로 카렌이 법석을 떠는 와중에도 잽싸게 뒤로 물러서 란슬롯에 탑승한 C.C.에게 감탄했습니다. 돌발사태에 약한 애송이와는 차원이 다른 대응력이었죠. 그런 주제에 있는대로 폼을 잡는데... 이전에 신전에서 그녀를 잡아챌 때, 웃으면서 죽게 해주겠다고 닭살을 한 번 떨어댔더니, 두고두고 책잡히는군요. 애비랑 애미를 날린 직후에도, 저 말을 상기시켰었죠. 1년 전 여인은 설령 자신이 스러지더라도 뒤돌아보지 말고 달려나가라 했었는데, 이번에도 돌아올 가망은 무지하게 희박하거늘 반드시 또 보자고 당부하는 게 알싸하더라고요.
를르슈를 놓치고, 눈앞에서 C.C.의 염장질을 봐서 그런지, 간만에 성천이 그렌라간(...) 모드로 들어가 마음껏 분탕질을 칩니다. C.C.는 이에 맞서 실력과 성능의 차를 메우기 위해 퍼시발의 미사일 방패와 기어스 친위대를 이용하는데요, 방패도 그렇지만 황당하게도 이전에 루키아노가 성천과 싸우던 전술을 좀 더 강도 높게 확장해 써먹더군요. 기어스 친위대를 희생타로 내주거나, 견제에 이용하는 거 보세요.
카렌이 ‘이런 무뇌충들!!’이라고 악쓰면서 열불을 내는데, 싸울 이유가 없는 놈들과는 더러워서 손 섞기 싫다는 겁니다. 기어스 친위대말고도 C.C.를 향한 말이며, 1년 동안 함께 지낸 사이답게 마녀의 권태감이랄까 허무감어린 생활양식엔 이골이 나있었거든요. 더욱이 공적으로든 사적으로든 싸울 이유가 명확한 카렌으로썬 기어스에 걸리거나 같잖은 계약관계같이 흐리멍텅한 이유 때문에 자신에게 덤벼드는 잡것들과 여편네가 마뜩찮았던 거죠.
C.C.와 카렌의 싸움박질은 머리끄댕이붙들고 싸우는 캣파이트에 가깝습니다. 카렌이 C.C.를 쏘아대는 것은 단순한 질투라기보다 상대방의 위치를 확인한 데서 오는 약간 저열한 안도감도 포함되어 있었어요. 1기를 돌아보자면 경애하는 멘토가 유일하게 동지라 공인한 데다, 자신이 들어서지 못하는 영역마저 공유하면서 계약관계에 불과하다고 잘라 말하는 여인네에게 복장이 뒤집히곤 했었죠. 그런 한편 카렌은 나름대로 C.C.에게 외경심도 지니고 있었어요. 특히 1년간 같이 지내면서 미치도록 자기중심적인 양태에 시달리긴 했으나, 선을 분명히 긋는 면모에는 감탄하곤 하더군요.
그랬던 여편네가 이전의 자신처럼 를르슈에게 얽매이려고 하니... 이전에 C.C.는 자기만큼 를르슈에게 가차없는 여자도 없다느니, 자신과 달리 너희들은 아직 삶을 돌이킬 수 있다느니 하는 식으로 고고한 마녀같은 오라를 발산하곤 했는데, 지금은 그저 한 사람의 여자로써, 인간으로써 반려자를 지키려하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꽤나 인간다워지셨다’고 비꼰 겁니다. 자기와는 다른 차원 혹은 영역에 속한 것 같던 존재가 자신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들어 실망감과 어두운 안도감을 느낀 거요.
거 왜 있잖아요, 상대와 같은 위치에 서기 위해 스스로 변하기보다 상대를 자신과 같은 자리로 끌어내리는 게 쉽다는, 그런 심리말입니다.
C.C.가 카렌과 비슷한 위치로 끌려나오다시피 하는 양상은 미장센에도 잘 드러나죠. 홍련의 복사파동에 화면구석이 조금씩 붉게 점멸하더니, 좀 있다 박살나면서 비상등이 켜지자 조종실이 완전히 새빨개지는 식으로요.
기체컬러링도 납득이 가요. 이전의 아카츠키보다 더욱 짙은 분홍색인데, 붉은 악마와 순백의 마제를 가로막는 마녀의 자가용이니 색상도 그 중간을 취하는 게 지당하다 이거죠.
카렌의 육감은 어느 정도 진실이었던 게, C.C.는 그토록 열세임에도 불구하고, ‘너에게만은...’하고 승부욕을 간만에 불태웠거든요. 상대방이 악우라 할 처자였으며, 또한 반려자를 위해 이전의 스자쿠처럼 최악의 찰거머리가 되어가는 그녀를 붙들어두고자 했던 C.C.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저 경험만을 쌓아가는 산 송장에서 여자가, 인간이 되어가고 있었던 겁니다.
그토록 줘패고 싶었던 여인네를 묵사발로 만들어놓고는 별반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뇌까립니다만.... 정말로 별 느낌이 없었다면 굳이 말로 내뱉거나 마무리를 할 필요도 없다는 듯 그냥 물러나는 식으로 표나게 행동할 리 없죠. 고대하던 화풀이시간이 닥쳐 샌드백으로 만들었지만, 예상과 달리 찜찜하기만 했을 테고 이를 부정하고 싶어 저리 내뱉은 거예요. 얼른 쫓아가야 할 인간도 있어 지체할 여유도 없었고요.
생각해보면 를르슈의 주변인물 중 카렌만큼 복합적이면서도 애매한 위치를 점거한 존재도 찾아보기 힘들죠. 처음엔 를르슈에게 있어 카렌은 스자쿠를 대신할 와일드카드였고, 카렌에게는 오래비를 투영할 존재에 불과했는데, 가면이 벗겨지고 여러모로 가까워지면서 그녀의 위치도 복잡해졌습니다. 쉽게 말해 스자쿠, 셜리, 나나리, C.C.의 위치를 어느 정도씩 포괄하면서도 그중 누구의 자리도 온전히 대체할 수가 없는 위치에 서게 됐죠. 그녀가 폭발한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겁니다. 19화에서 모든 걸 잃다시피 한 청년의 빈자리를 채워주려 했으나, 위악서린 거절만 들었던 게 이런 양상을 함축해서 보여주죠.
22화에서도 큰 맘 먹고 사고를 쳤지만, 끝끝내 대답을 얻지 못했고요. 물론 두 번 다 주변상황이 여의치 않기도 했고, 를르슈는 나름대로 배려랍시고 한 거지만요. 그녀가 를르슈를 막고자 하는 대의명분도 분명 존재하지만, 좀 더 깊숙한 곳에 이전의 스자쿠처럼 뒤틀린 애증이 자리 잡고 있는 건 엄연한 진실입니다.
카렌이 전반부엔 C.C.에게, 막판엔 스자쿠에게 살의를 내뿜는 것도 비슷한 맥락에서 이해해야겠죠. 물론 스자쿠야 진절머리 나게 부딪혀왔고, 여러모로 양립불가능한 놈팽이긴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 두 사람이야말로 를르슈를 각자의 방식으로 받혀주는 검과 방패인 동시에 거대한 양대 기둥이기 때문입니다. 이전부터 자신이 되고자 했지만, 종당에 될 수 없었던 영역을 들이찬 인간들이었던 거죠.
세 자루의 검
22화의 개망신을 어느 정도 만회한 지노와 트리스탄의 활약을 봅시다. 전함과도 맞먹는 절대수호영역이 지노의 칼질에 아작나는데, 위력문제라기보다 속성 탓이었고 그가 휘두른 칼이 갤러해드의 엑스칼리버를 회수해 개조한 병기였기 때문이었죠. 갤러해드의 엑스칼리버는 일찍이 신호의 천자포를 받아낸 데다, 이를 사방으로 흘려보내 역습을 가했던 ‘성검’이었습니다. 그 어떤 힘이라 한들 통용되지 않는다고 했던 비스마르크의 발언을 생각해보면, 칼 자체가 육중하고 잘 들어서라기보다 에너지 계열의 병기나 방벽은 어떤 종류라 한들 모조리 커버 가능한 기능을 지니고 있다고 봐야겠죠. 차라리 란슬롯의 MVS라면 쉽게 막았을 물건인 겁니다. 물론 성천의 데이터를 얻은 락시아타가 트리스탄을 개수해 출력이 올라간 덕도 있을 테고, 워낙 급하게 막느라 신기루의 방벽도 엷기는 했죠.
칼이 두 개다 보니 신기루를 때려잡는데다 스자쿠도 금방 해치우질 못하는데요, 일단 여태껏 드잡이질 하느라 무장이 약간 부족하기도 했고... 무엇보다도 실내전이었다는 게 문제였죠. 이 좁아터진 공간에선 특유의 널뛰는 곡예나 전방위공격은 못써먹으니, 결국 기초적인 백병전으로 싸울 수밖에 없었거든요. 물론 그럼에도 성능차야 압도적이지만, 지노는 조종술만 치면 세계에서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친구니 나름 이빨이 들어갔던 거죠.
란슬롯, 트리스탄, 몰드렛드는 모두 배신을 테마로 삼는 이야기들의 주역들이었죠. 그렇기에 본작 방영 전부터 를르슈에게 돌아설 친구들이 될지도 모른다고 주목받곤 했는데... 다른 기체는 몰라도 트리스탄은 개념을 달리 해야 했습니다. 란슬롯과 비슷하게 충성심과 사랑사이에서 갈등했던 것은 비슷하지만, 란슬롯이 스스로의 정욕 때문에 발단을 제공했고, 트리스탄은 사고로 인해 약을 잘못 먹어 우발적으로 금기를 범할 뻔한 기사였죠. 란슬롯은 동지들과 주군을 죽음으로 몰아넣으면서까지 사련을 지켜갔으나, 트리스탄은 끝까지 충성심을 견지했고, 죽기직전에서야 애정을 관철하려 했고요.
이런 공통점과 차이점은 스자쿠와 지노의 내외에 걸친 사정과도 통하죠. 정신적으로 결함이 적지 않은 데다, 배신을 거듭한 스자쿠와 달리, 밝고 통 큰 성격을 지닌 데다 적대하는 진영의 여성-카렌-에게 호의를 품으면서도 꿋꿋한 지노... 이리 생각하고 다시 보니 둘의 개싸움도 재밌더군요.
카렌에게 있어 C.C.와 스자쿠가 반드시 부딪혀야 할 적들이었던 것처럼, 스자쿠에게는 지노와 카렌이야말로 피해 갈 수 없는 존재들입니다. 일본인이었지만 브리타니아인이 되고자했던 자신과 달리 브리타니아인으로써 살아갈 수 있음에도 일본인이길 고집하는 처자, 가족사항부터 뒤틀린 자신과 달리 가문, 성장과정, 성격, 재능 그 무엇도 흠잡을 데가 없는 청년. 무엇보다도 수많은 번민과 배반을 거듭해온 자신과 달리, 나름대로 고민은 하되 나라와 자기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다는 점에 의심을 한 적 없이 곧장 나아가는 그네들은 각각 일본과 브리타니아를 대표하는 최대의 난관으로써 손색이 없는 겁니다.
물론 지노보다는 여러모로 스자쿠 자신과 입장이 뒤틀리듯 역전된 카렌이야말로 더욱 그렇고요.
체크메이트
슈나이젤은 자신의 안배가 완전히 뒤집히자, 저번 편과는 또 다른 의미에서 가면을 벗고 으르렁거립니다만, 역시랄까 금방 평정을 되찾고 최선의 수를 짚어나갑니다.
코넬리아를 살려보낸 게 의외라고 하시는 분들이 있는데... 슈나이젤에겐 누이가 살아있든 죽어있든 그다지 상관없었던 겁니다. 그녀의 말대로 사랑해서라기보다 자신에게 대든 누이를 엄벌에 처할 정도로 집착했던 적이 없었으니까요. 그냥 운 좋게 살았으니 대충 치료해서 내보낸 거죠. 아마도 글라스톤 나이츠의 마지막 생존자라 할 친구에게 맡겨서 내려 보낸 것 같더군요. 그러니 저 친구도 봉래섬에 있는 거겠죠.
코넬리아는 시기만 잘 만났으면 왕 중 왕이었을 거라 평가하는데... 동감입니다. 자기 자신을 비우고 사람들의 눈물을 마시는 ‘왕’으로써 딱이죠.
슈나이젤은 혹시나 를르슈가 자신의 덜미를 잡을 때마저 대비해 극단적인 캐슬링을 몇 가지 생각해놨더군요. 방심이나 오만과는 거리가 먼 양반이니까요. 그토록 힘들여 만든 요새를 날려먹게 됐는데도 다음 헤게모니를 노리는 야심가들에게 접근해 설계도를 제공하여 새로 건조한 후, 갖고 나르겠다는 수작을 토로하는데... 이는 제로 같은 테러리스트가 잘 써먹던 수법 중 하나였다는 점에서 두 형제의 입장이 역전된 걸 상기시켜줍니다.
그가 나나리를 버려둔 이유는 를르슈가 그 아이부터 구하러 갈 거라 생각하고, 미끼작전을 벌이기 위함이었죠. 물론 자신을 먼저 노릴 때도 대비했는데, 나나리에게 스위치를 맡긴 것은 그저 누이의 감상에 동의해서 그런 게 아니었어요. 설령 자신이 당한다 한들 를르슈가 쉽게 어쩌지 못할 누이가 스위치를 쥐고 있으면, 자폭까지 시간을 족히 벌 수 있으니까요. 더욱이 나나리는 눈 때문에 기어스도 안 통하는 입장입니다. 최악의 경우 자폭마저 물 건너갔을 때는 오래비를 막고자 하는 누이의 열망만이 최후의 교두보가 될 테고 정말로 그렇게 됐죠.
형의 뒷덜미를 잡아챈 를르슈는 방안에 뒀던 검은 왕을 내보이는데, 이는 승부에 집착하지 않는 슈나이젤과 달리 자신은 주금성에서의 대국 이래 계속해서 형에게 이길 방도를, 그의 본질을 고찰해왔다는 걸 가르쳐준 겁니다. 세상 누구보다도 넘어서야 할 목표였던 형과 싸울 때를 대비해 ‘검은 왕’의 관점에서 끊임없이 공략법을 찾아왔다는 뜻이죠.
형제의 형이상학적인 토론 속에서 3부자의 본질이 드러납니다. 어제를 돌이키고 싶었던 애비, 오늘을 고정시키고자 했던 형, 내일을 지향하는 아우... 샤를은 집단무의식의 수정을 통해 산 자만이 아니라 먼저 떠나간 자들마저 아우르려고 했는데, 인간에게 있어 가장 방대한 시간개념은 결국 과거죠. 현재는 순간이며 미래는 불확실하기에 집적된 시간인 과거가 가장 큰 것은 당연하며, 샤를의 행위는 그토록 큰 과거를 아우르려 했다는 점에서 어제를 지향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를르슈가 변화 없는 일상은 경험에 불과하다고 슈나이젤을 비난하는 언변은 전에 애비에게 했던 말이며, 본편에선 죽지 못해 살던 마녀도 내뱉은 말이었죠.
황족이란 기호로 세계를 내려다보는 자의 한계라... 그러고 보면 ‘슈나이젤이 머리놀음은 확실히 를르슈보다 나을지도 모르지만, 동생처럼 모든 걸 잃다시피 하고 밑바닥에 떨어져도 이만큼 기어오를 수 있을까’라고 지적한 분이 계셨죠. 나락으로부터 치고받으며 올라온 동생과 위에서 내려다보기만 한 형과의 차이는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를르슈가 형의 어깨를 잡는 순간 진짜 가슴이 덜컥, 했죠. 이전에 마오를 잡았던 수작으로 형을 엿 먹이다니. 마오의 경우는 너무 저급해서 가능했던 건데, 슈나이젤의 경우 외려 지나치게 똑똑한지라 역으로 대화양상을 간파할 수 있었던 겁니다. 더욱이 이는 를르슈가 자신의 두뇌만으로 오르지 못할 나무를 뛰어넘었다는 점을 증명하기에 더욱 놀라웠죠. 그토록 들어서고자 했던 ‘제로의 영역’앞을 아무렇지도 않게 가로막고 서있던 자였거늘...
꼴을 보니 저놈의 테입은 역시 미리 녹화해뒀다가 튼 것 같더군요. 다모클레스에 도착한지 얼마 되지도 않아 급조했다 치면 클로즈업부터 시점이동까지 할 만큼 여유가 있진 않았을 테니까요.
처음부터 이상하긴 했죠. 닳아빠진 소년만화도 아니고 를르슈가 새삼 형이랑 공자님말씀을 늘어놓을 필요가 없었거든요. 논리나 말재간으로 질 인간도 아니고, 실제로 그랬잖아요. 요는 밑작업이었던 거죠. 자기 목숨도 집착 안 하는 인간에게 죽음보다 찐한 ‘패배’를 안겨주는 동시에(어찌됐든 가장 쓰러뜨리고 싶었던 자니까요.), 자폭모드에 들어간 프레이야의 기폭코드-슈나이젤만이 알고있는-를 해체시키기 위함이었죠.
슈나이젤은 이미 그 시점에서 동귀어진을 각오하고 있었어요. 를르슈가 섣불리 모습을 드러내서 기어스를 걸려하면, 눈을 감은 후, 갖고 있던 총으로 자살하고도 남았겠죠. 기어스를 걸어둔 꼭두각시들에게 잡아오라고 해도 마찬가지였을 테고요. 그렇기에 자신의 눈길을 피할래야 피할 수 없는 위치를 은밀히 잡아챌 때까지 그의 주의를 돌릴 필요가 있었기에 저런 쇼를 한 겁니다.
카논과 디트할트에게 기어스가 아니라 뽕을 놔서 맛 가게 한 이유는 자신이 슈나이젤에게 다가서기 전에 이놈들에게 기어스를 걸려고 육성을 내면 형이 알아채고 대응했을 테니까요. 그래서 꼭두각시들에게 조심스레 접근시켜 약을 주사하게 해 동시에 보내버린 겁니다.
슈나이젤은 인성을 지닌 존재라기보다 스스로를 물 흐르듯 상황에 최적화시키는 시스템의 유지력이 사람거죽을 뒤집어 쓴 것과 다름없는 인간입니다. 그가 패배를 피해 다니고, 늘 본전이나마 확실히 건질 수 있도록 신경 썼던 것도 오기나 승부욕과는 달랐죠.
슈나이젤은 동생과 자신의 입장이 역전되자, 동생이 행했던 짓을 좀 더 세련되게 응용하기까지 합니다. 압제자를 악의 축이라 선동하며 스스로를 정의의 대변자로 자처하고, 제국의 적인 흑기사단을 이용하더니, 테러리즘을 이용해 계속 싸워 나가려드는 것도 그렇고, 몰리다 못해 자기 자신마저 객체로써 인식해 동귀어진을 고른 양태는 를르슈가 황제와 함께 아카샤의 검에 갇히려한 행각과 흡사했죠. 동생은 이런 그의 속성을 역으로 이용해 일찍이 형이 자신을 몰아넣었던 방식으로 승기를 잡은 겁니다. 모니터 대면을 통한 시간 끌기 및 굳히기도 그렇고, 격납고에서 직원들에게 기어스를 걸어 옴짝달싹 못하게 한 것은 이전에 슈나이젤이 흑기사단을 말발로 구워삶아 제4격납고로 몰아붙이던 걸 연상시킬 정도였죠.
형만한 아우 없다고 하지만, 그 형에 그 동생이랍시고 서로서로 흉내 내며 상황에 맞는 최선책을 모방했던 게 승패의 갈림길이 된 셈이죠.
마주친 눈길
쇼킹한 순간이 적지 않은 본편이었지만, 나나리의 개안은 그 모든 것을 불식시켜버립니다. 그 정도로 당혹스런 상황이었으며, 눈을 뜬 순간 절묘하게 배경음을 없애는 연출도 절묘했죠. 고개를 돌릴 때부터 짐작해야 했는데 말입니다. 나나리의 개안이 스위치를 찾는 와중에 이뤄졌다는 게 기가 막히는데, 어떻게든 오래비를 막고 싶었기에 그 어느 때보다도 필사적으로 닫힌 눈이 열리기 바랬고, 힘을 줬던 건데... 유피가 죽어가던 순간에 기어스를 제껴버렸던 원동력이 스자쿠를 해치기 싫다는 바램이었듯 나나리 또한 양상은 달라도 애틋한 마음으로 기어스를 찍어누른 겁니다.
10년 가까이 감고 있다 떴는데, 실명하지 않나? 그렇게 생각했는데, 아는 의사분께서 ‘홍채의 광량조절능력을 우습게보면 쓰나, 그렇게 따지면 10년, 20년간 잠들어있던 의식불명환자는 모조리 장님되게?’라고 답해주시더군요. 눈이 아프고 주변사물들이 또렷이 보이진 않지만, 그런대로 위치파악은 할 수 있다나요? 나나리가 막판까지 눈을 재차 감고 있다가 간신히 힘을 줘서 다시 뜬 이유는 눈이 뜨였지만, 아픈 고로 찾을 물건만 찾은 후에 오래비와 마주할 때까지 통증을 줄이려고 눈을 감고 있었던 거죠. 아프긴 하지만, 티미한 눈으로나마 어떻게든 를르슈를 똑바로 마주보기 위해 있는 힘껏 부릅떴으니 눈을 뜬 자태가 좀 어색할만도 했죠.
그러고 보니 를르슈의 경우 외모는 어머니로부터, 내면은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구석이 많았죠. 나나리는 그 반대라 할 수 있고요. 이 남매의 유전은 마음을 비추는 창이라 할 눈동자의 색에도 반영되고 있던 걸까요?
남매가 그토록 바라던 염원중 하나가 이런 식으로 구현될 줄이야... 샤를이 죽어서 해제됐는데, 그동안 눈치 못 채고 있다 본편에서 열심히 스위치를 찾다가 저리 된 거란 얘기도 들려오고, 저번 편에서 아냐가 기억을 되찾고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이 또한 단순히 마리안느가 사라졌기 때문만은 아닐 공산이 있긴 하죠. 하지만 전 나나리가 자신의 힘만으로 기어스를 깼다고 믿고 싶습니다. 슈나이젤조차 굴복시켰던 왕의 힘으로도 결단코 지배할 수 없는 의지의 소유자란 뜻이며, 그런 존재야말로 를르슈의 마지막 적수로 어울리니까요.
를르슈에게 최대의 적은 슈나이젤이었지만, 스자쿠가 한편이 된 이상 최악의 적이라 할 존재는 바로 누이라 할 수 있죠. 한 때 ‘제로’를 지향했던 그의 어둠을 보다 순수하게 형상화시킨 듯한, 악의의 결집체가 형이었다면, 누이야말로 그의 인성이 빚어낸 존재이니까요. 를르슈는 ‘왕’으로써의 난관을 뛰어넘었지만, 이번엔 ‘인간’으로써 통과의례를 강요당한 셈입니다. 그렇기에 누이는 왕의 힘을 지닌 오래비에게 당당하게 눈을 떠 보인 겁니다.
닫으며.
본편은 전반적으로 대립의 흐름이 잘 구성되어 있습니다. 카렌이 C.C.와 스자쿠를 상대하고, 스자쿠가 지노와 카렌을, 를르슈가 슈나이젤과 나나리를 연이어서 상대하는 전개는 그 자체로 그들의 내면과 삶, 관계를 잘 함축해서 보여주죠.
본편의 전황을 보면 슈나이젤 및 흑기사단과 제국군의 대립으로 보이나, 실상은 슈나이젤 측과 흑기사단, 를르슈 측이 서로의 꼬리를 물고 무는 삼파전에 가깝습니다. 이런 흐름은 본편의 축이라 할 세 인물들이 맞부딪히고 엇갈리면서 각자 두 번씩 큰 싸움을 치르는 판놀음과도 맞물리죠. 이런 양상은 소소한 싸움들과 대국이 서로의 등을 떠미는 과정에서도 잘 드러납니다. 다모클레스의 빈틈을 노린 를르슈의 돌진이 흑기사단의 역습을 유도해, 를르슈가 직접 결사행에 나서게 되며, 그의 역습으로 인해 다모클레스가 흔들려 나나리가 스위치를 놓쳐 후반의 대형사고를 자아내죠. 지노는 신기루를 잡고, 스자쿠는 트리스탄을 아작내지만, 이로 인해 지노는 절대적인 방어력으로 인해 아군의 개입마저 허용치 않았던 방벽을 허물어 카렌이 쳐들어오게끔 해주고요.
산 넘어 산에 직면하는 작중인물들의 행보가 보는 사람의 어깨도 묵직하게 짓누르는, 그런 에피소드였습니다.
ETC...
를르슈. 말도 안되는 지옥행에 동참해준 수하들에게 건넨 감사는 그의 생애에서도 몇 안 되게 진실미가 담긴 인사였겠죠. 사요코나 세실만이 아니라 까불이 로이드마저 제대로 예의를 갖춰 전송하는데, 그가 이때껏 모셨던 상전 중에 이리도 깍듯이 예의를 갖춘 존재가 있었던가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들이 이렇게까지 받혀준 것은 역시나 청년의 최종도달점과 그 의도 때문이겠죠. 자폭과 다름없는 청년의 행각에서 그들은 도대체 뭘 느낀 걸까요?
니나의 한마디에서 그나마 알 수 있는 것은 를르슈가 지향하는 바가 결과적으로 유피의 바램마저 포괄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 누구도 아닌, 니나가 이를 납득하고 있다는 것만 봐도 뭔가 있긴 한 듯싶은데...
스자쿠. 비스마르크야 실력 상으로는 압도적으로 밀리는 상대였다 칩시다. 근데 이젠 실력으로나 성능으로나 고만고만한 녀석들에게마저 기어스를 발동시키는데... 무슨 씨앗 터트리니? 덕분에 우리 킬러 토마토께서도 씨앗 터트릴 새 없이 도막이 나셨잖아요?
신기루. 를르슈는 어째서 최종결전에 돌입할 때마다 자가용을 아작내는 건지 원. 주인 잘못 만난 거웨인과 신기루의 영면을 빌 따름입니다.
디트할트. 나름대로 마음에 든 녀석이었는데. 백작, 알베르에게 제대로 복수당했구려.
코넬리아. 어리석기는 무슨... 당신 오래비랑 동생이 또라이인 거지.
아파테 아레티에. True Lies? 각자 기만과 진실을 뜻하는 여신들의 이름인데, 를르슈는 단순히 투항만이 아니라, 그 후에 세계를 위해 무엇을 해야 할지도 지시한 게 아닐까요.
타마키. 풍문에 따르면 스스로를 제로에게 있어 최고의 친구로, 스자쿠에게 있어선 라이벌로 생각하고 있었다던데... 진짜였나 봅니다.
나나리 때문에 제레미아의 캔슬러가 그래도 한 번은 쓰일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정말 끝까지 예상을 작살내는 작품입니다. 오우기를 비롯해 흑기사단의 구성원들이 왕창 살아남은 것도 그렇고요.
밀레이의 말은 를르슈와 스자쿠만이 아니라, 카렌, 니나, 아냐, 지노에게도 해당됩니다. 생각해보면 이 시기 애쉬포드 학원은 정말 역사적인 장소로 길이길이 후세에 전해질 공산이 크군요. 를르슈가 제로였다는 사실을 제외하더라도 말입니다. 다만 이산가족상봉이랑 동창회는 딴 데 가서 조용히 좀 치렀으면 싶습니다만.
그 날 이후, 난 쭉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 살아있다는 거짓말을... 이름도 거짓, 경력도 거짓, 거짓으로 가득하지. 전혀 변하지 않는 세계에 질렸으면서도... 거짓이란 절망에 포기하지도 못하고... 하지만 손에 넣었다. 힘을. 그렇기에!
그 날 이후, 나는 쭉 방황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른다. 전혀 변하려들지 않는 세상에 질린 채... 허나 거짓이란 절망을 받아들여 포기하지도 못하고... 아, 이름도, 경력도, 힘도 모두 나만의 진실을 찾아내기 위한 수단이었을지도 모른다. 계속 갈망하고 있었던 걸지도 모르지. 그렇기에...
다음 화 예고멘트는 첫 화에서 처음으로 왕의 힘을 얻은 후에 뇌까렸던 말들의 변주더군요. 소년이 생애 처음으로 자신만의 진실을 획득했다고 착각했던 순간의 말들과 청년의 고뇌어린 탄식은 목소리에 실린 무게 자체가 다르더군요. 하는 김에 1기 23화의 마지막 대사도 다시 들어봤습니다만... 점점 변해가는 게 실감날 따름이었습니다. 치기와 패기만을 밑천삼아 도약했던 소년이 어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게 말입니다.
그럼...
P.S. 막바지에 이르렀다는 사실에 시원섭섭한 좌절을 금할 수 없습니다. 마크로스F도 그렇고... 이제 무슨 재미로 살아야할지.